역사 교육

역사를, 랑케를 따라 “본래 그것이 어떠했나?”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같은 사실성에 대한 관심은 기원전 550년경에 출생한 밀레토스(Miletos)의 헤카타이오스(Hecataeos)에게서 처음 나타난다. 그는 신화와 전설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진술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사실’을 택했다. 그의 『계보』의 첫 단락은 아마도 역사의 탄생 증명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쓴다.”

그러나 ‘역사의 아버지’라는 명예는 헤카타이오스보다 2세대 뒤에 활동한 헤로도토스(Herodotos)에게 돌아갔다. 그것은 아마도 헤카타이오스가 그리스 역사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기술한 반면,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다루었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침입이라는 ‘사건’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페르시아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역사가는 거대한 제국의 역사 · 지리 · 풍습 등으로 『역사』의 전반부를 구성했다. 말하자면, 페르시아 전쟁의 ‘문화적 원인’을 밝힌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원인 탐구’를 위해서 관련 지역을 여행하여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역사가는 자기가 들은 기이한 이야기들을 역사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는 사실과 허구를 가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청중들에게 흥미를 불어넣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가 ‘사실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헤로도토스는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이집트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취하고 있는 원칙은 각각의 사람이 말하는 바를 들은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다.”라고 털어놓는다.

『역사』의 사실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핵심 주제인 전쟁과 관련해서, 페르시아의 전투원 수를 264만 1,619명으로 ‘정확히’ 산정한 것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도 신뢰성을 상실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가 아니라 ‘거짓말의 아버지’라고 평가하는 것은 시대착오를 범하는 것이다.

구전시대라는 한계를 고려할 때, 중요한 것은 사실성을 확보하려는 ‘의지’와 ‘노력’이기 때문이다. 키케로가 “역사에서는 ‘사실’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라는 기준 위에서, 헤로도토스의 책에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역사의 아버지로 인정한 것은 ‘사실성’을 향한 역사가의 노력을 평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는 후배 역사가들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의 아버지’였다. 한편, 헤로도토스의 동시대인이었던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고민했던 문제는 무엇보다도 ‘사실성’이었다. 그는 헤로도토스를 능가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 중의 사건에 대해, 나는 그것을 아무에게서나 들은 바 혹은 내가 생각한 대로 기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보다는 직접 체험에 근거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전한 사건마다 가급적 엄밀하게 조사한 뒤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는 말은 다분히 헤로도토스를 의식한 말로 볼 수 있다. 그는 헤로도토스를 ‘모방’하여 동시대의 전쟁을 ‘역사’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자신이 직접 장군으로서 전쟁에 참가했다는 데에서 우월감을 느꼈고, 또 ‘사료 비판’을 가해 사실성을 높였다.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가 양념으로 가미했던 ‘문화’를 배제하고 오로지 전쟁과 정치로만 역사의 범위를 좁혔으며, 또 연설을 창안해 삽입하는 나름대로의 수사학적 기법을 활용하기도 했다.